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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도서관 속엔 많은 얼굴이 있다

지나치는 이름을 눈동자가 훑는다
발걸음이 멈추고
책등을 집는 손가락
펼쳐서 바라보다 이내
책을 닫는 손

눈동자는 쉬지 않는다
세련되게 단장한 표지
혹은 이목을 끄는 제목
가끔은 베스트셀러 한 번은
손에 들어봤을 책
마지막 페이지가 넘겨진다
책과 이별하는 손가락

책을 다시 빼낼 때는 아주 가끔
추억하는 손끝 때문에
몇 페이지 지나지않아 책과 등돌린다
말 없이 계속되는 발걸음

서가 사이에서 여전히 헤메고 있다
너를 보기란 쉽지 않은 일
아무 책이나 집어 의자에 앉는다
겨우 기다림을 마주하는 지금

도서관에는 많은 얼굴이 있다
책을 보는 눈동자 어딘가에서
그걸 바라보는 눈동자

회복하는 인간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건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큰 상처라도 제 때 응급처치를 하고 잘 처리만 하면 시간이 지나 낫기 마련이다. 그건 아마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큰 상처는 다 낫더라도 흉을 지게 만든다. 마음에 난 상처도 삶에 있어 큰 변화를 만들기도 한다. 회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회복하지 못한 그런 상처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한강의 소설, <회복하는 인간>은 너무나 큰 상처를 입어 자신의 행복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사람에 대한 소설이다. 주인공은 서른이 넘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하지 못하고,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해 여태까지 원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라디오 작가다. 평범하게 생긴 그녀에게는 그녀와는 달리 후리후리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가냘프게 생긴 언니가 있었다. 그녀가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거라 쉬이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녀의 누이가 그녀의 단점들을 질투했다. 너무나도 다른 두 자매는 조용히 서로 상처를 주고 입었다. 둘 가운데 누가 더 차가운 사람이었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물어볼 정도로 두 자매 사이는 차가웠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누이는 평생 혼자 짊어져야 할 짐을 그녀와 같이 짊어지고자 했다. 소파수술이 그것이었고, ‘통념대로’라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짐을 나누고 난 뒤 누이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누이를 사랑했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서 사랑받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차갑게 살았고 누구보다도 무심하게 서로 상처를 주고 입었다. 상처 입은 한 쪽이 죽어가던 날, 한 쪽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살아남은 그녀는 그 행복감에 죄책감을 느꼈다. 누이의 장례식 날 그녀는 발목을 삐었고, 삔 발목을 치료하려다 화상을 입었고, 그 화상은 나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녀가 재기불능의-더 이상 제대로 걸을 수 없는-상태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일주일이었다. 그녀를 기쁘게 했던 자전거를 타도 그녀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다.

소설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난다. 제 때 치료를 하지 않아 더 이상 나을 수 없게 된 화상에서, 치료하려다 오히려 화상을 입게 된 삔 발목으로. 그녀가 사랑했으나 끝내 사랑받길 거부했던 그녀의 누이로. 그런 누이의 질투와 상처들과 안쓰러운 죽음으로.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것으로. 더 이상 사랑하던 것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의 상처로. 그리고 그 상처에서 행복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그녀로. 소설은 이 두 자매의 상처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 상처 속에서 살아남은 주인공의 외로움과 슬픔 또한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서술자의 서술처럼, 주인공은 모르고 있다. 절대 낫지 않을 것 같은 화상이 시간이 지나 점 하나 찍힌 것처럼 나아가듯 지금의 아픈 마음도 언젠가는 점점 나아질 거라는 것을. 지금은 그렇게 원하지 않는 행복을 다시 느끼게 될 거란 것을.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거란 것을.

상처 입는다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다. 누구나 아픈 것을 싫어한다. 단순한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요, 마음의 상처까지도 그러하다. 때문에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는 것은 상처 입을 일들을 피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처는 그녀가 누이가 말하듯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낫는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상처에 얽매여 사는 것은 아닌지. 별 것도 아닌 것을 상처 입을까봐 두려워서 빙빙 돌아가며 사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런 물음과 더불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면 좋을 듯하다. 우리는 회복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스콜

그 날 강의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가 강의실에 도착하고 난 후였다. 슬립 모드로 있던 휴대폰 화면을 켜고 메시지를 확인한 후. 그는 좀 더 일찍 확인할 걸, 하는 생각을 했다. 알람 기능을 꺼놓았던 탓이 컸다. 아이폰은 카카오톡 알림 기능을 꺼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입을 다문 스마트폰은 벽돌이나 다름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벽돌폰. 시간 낭비했다.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아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가 고민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추적추적. 언제부턴가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를 맞이했다. 땅바닥에 떨어져 찰팍, 하고 부서지기 전까지 빗방울들이 합쳐지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빗방울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언제였을까. 우산을 못 갖고 온 탓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오롯이 맞으며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길. 그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제 때 연락 받지 못한 탓에 과목 점수에 반역되는 학과주최행사에 참여하지 못해 약간의 불이익-불이익이라는 이름의 감점-을 당한 적도 있었고, 꼭 가고 싶었던 강연이 있었는데 시간이 변동된 걸 제 때 알지 못한 바람에 못 들은 적도 있었다. 국어 작문 조별 모임 때는 30분 전에 겨우 연락이 닿아 부랴부랴 준비해서 나간 기억도 있었다. 그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까지는 안 바라니까 문자나 한 통 넣어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은 그가 카톡 알림을 켜놓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고 몇몇은 데이터가 없어서 겪은 경험이었다. 이런 아쉬움은 대체로 그가 카톡 알림을 켜놓는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톡 알람은 고문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학과 동아리와 중앙 동아리, 조별과제 팀, 기타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카톡 대화가 쏟아져 내렸다. 대부분은 자체로 그에게 별 의미 없는 내용이거나 당장 쓸 데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 대화들에 일일히 신경을 쓰는 건 퍽 귀찮은 일이었다. 놓친 대하를 되돌려 보는 것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는 카톡 알림을 꺼놓고 정기적으로 대화를 읽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하루 몇 번 정도면 일찍 공지되는 중요한 소식은 대부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습관 때문에 그에게 갑작스럽게 전달된 카톡을 읽기란 힘들 일이었다. 어김없이 이런 사태는 반복되었다. 쏟아지는 대화 속에서 그가 필요한 단어를 제때 잡아채는 것은 운 좋게 타이밍이 맞아 떨어져야 가능했다. 쏟아지는 문장들이 그의 휴대폰 속에서 하는 것이라곤 배터리를 갉아먹는 것밖에는 없었다.

스콜이라는 단어를 배운 어린 시절. 언제였을까. 그 후로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스콜이 내렸으면 하는 막연한 희망을 종종 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상상은 퍼붓는 빗속에서 상쾌한 기분으로 젖어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하면 기분 좋은 그런 상상이었으나 그만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스콜과 마주하는 것 그가 사는 곳에서 절대 찾아올 수 없는 순간이었다. 많은 수분이 금새 모여, 내리지 않고서 더는 버틸 수 없는 구름이 아열대지방에서 나올리는 없었다. 설사 그럴 수 있다 해도 그가 사는 곳은 아열대지방 도시 중에서도 비구름이 잘 형성되지 않는 곳이었다.

예전. 비가 많이 내렸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있던 그와는 달리 그의 이웃들은 비가 많이 내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이 범람할 일도, 홍수가 날 일도, 무엇보다 버스 운행이나 지하철 이용, 차량 운행이 제한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린 그는 그들의 생각이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나기를 맞으며 도서관으로 가고 있는 지금. 그는 이웃들이 왜 그렇게 변함없는 걸 좋아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푸른 눈동자

책장에 꽂힌 책 사이에선
쿰쿰한 살냄새가 났다
털이 무성한 페이지를 쓰다듬는
여린 손 헤진 표지를 푸른
눈동자를 가장 사랑한다
글자들을 몇 번씩 돌이킨 적이 있다
그 글자들을 몸에 새길 수 있을까

그 딴엔 곧잘 여러 책에 입 맞춘다 생각한다
젊은 책은 사과만큼 싱싱하다
한 입 베어 물면 막 잉크 마른 냄새
손 안에 가득 찬다 사각사각
생기 있는 단어들이 빈 노트 위에 자리한다
연필로 적히는 삶의 습작들
몇 번 쓰다 지우개로 지워지는

펜으로 적고 싶은 건 오래된 책의 문장
종이 위 쏟아진 커피처럼 얼룩 남는
글자 한 획에는 그 만큼의 세월이 녹아 있다
타이어만큼 질긴 단어들
씹어도 잘게 잘릴 기미 없이
삼켜버리면 피부로 될 수 있을까

껌처럼 질겅거리다 이내
단어들을 뱉어낸다
한 문장만 빼낸 채
눈동자는 책을
덮었다

그의 글자들 빠르게
빈 종이를 채워나가고
얇은 수염 머리카락
모두 잘려나가고
다시 자라고
다시 잘려나가
굵어지고 또
무성해지고
면도되길 몇 시절 지나
피부에선 상처 아문
쿰쿰한 냄새를 풍길 쯤

그가 책장에 꽂혔다
곁엔 사람 냄새 나는 책들 그는
어느 순간엔가 꺼내져 펼쳐진다

헤진 표지
억센 피부를 쓰다듬는 여린 손가락으로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

일기

어제로부터의 문을 잠깐 걸어두고
내일을 쫓는 단어를 찾는 손

텅 빈 종이 위 오늘을 적는다
몸에 맞지도 않는 넓은 필체 하루
페이지를 넘기고 바라보는
눈동자 속으로 시침같이
매일을 지나다 가끔 죽는 시계처럼
걸음을 멈추고 마주하는 다른 것
넋놓고 흘리다 건전지 갈고
다시 벽에 걸리면

어제로부터의 문을 잠깐 걸어두고
내일을 쫓는 문장을 쓰는 손

텅 빈 종이를 빽빽히 채워야 해
몸이 불어나 꽉 조이는 작은 필체
하루 페이지를 넘기고 바라보는
눈동자 속으로 초침처럼
달려 나가다 미아가 되어
길잡이를 찾다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도 헤맬 수는 없지 먼저
달리는 게 좋은 삶 망설이다
틈 찾아서 조금씩 나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어제로부터의 문을 잠깐 걸어두고
내일을 쫓는 펜을 쥔 오른손

텅 빈 종이 위에 오늘을 쓰는
어울리지 않는 불안한 필치
하루 페이지를 넘기고
바라보는 눈동자
속으로 별을 찾고
조심스레 한 걸음
시계 분침 가듯
한 발자국을 내딛다
글자 하나를 마주할 수 있다면
지금이 빛날 수 있다면

둘의 시선

얇은 유리문 너머 두꺼운 공기
사이로 선 그림자 두 개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하나 고개를
돌렸다 슬그머니 빗소리
들리고 소리 없이

뒤따르는 눈동자

ㅇ_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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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Hills - Don’t Be Afraid:

개포동 김갑수 씨의 사정 독후감

개포동 김갑수 씨의 사정이라니 꼭 허지웅같은 이름이다. 사정이라니. 탁 펼치니 서문이 나오고 답지 않게 진지한 글자로 그가 말한다.
"이 책은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어 다음 장을 넘기니 그 뒤엔 ‘갑수씨의 기묘한 섹스’에 관한 내용이 기다리고 있다.
개포동 정자왕 김갑수씨는 ‘내’가 보기에 괴물같은 사람이다. 행복하고 행복한 덕에 행복인 줄 모르던 사랑을 떠나보낸 후, 그는 사랑을 잊으려 거침없이 여자들과 섹스하기 시작했다. 그의 많았던 관계는 물론 흡족했던 부분이 있을지언정, 그것이 연애로, 혹은 사랑으로, 아님 결혼으로 지속되지는 않았다.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연애의 아쉬움을 잊으려 섹스를 시작했던 그에게 섹스가 남겼던 것은 상처 뿐이었으리라. 섹스가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성공이라 쉬이 여기는 뭇 남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그에게 섹스는 실패의 기억들이다.
그러나 그가 연애(혹은 연애시도)를, 아무리 이해할래야 할 수 없는 여자들과의 관계를 그만둘 수는 없다. ‘나’에게 그는 자신의 친구 얘기를 털어놓으며 말한다. 친구가 아무리 목사가 어떻다 신심이 어떻다 해도 교회 가는 걸 포기할 수 없듯이 우리 또한 연애하는 걸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행복해지긴 해야겠으니까. 천국에는 가야겠으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대충 뭐 이거랑 별반 다를 바 없는 것같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나큰 목적을 위해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돌고 도는 삶과 그 삶에서 고통받음에 벗어나질 못해서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졌기에,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 속으로 내쳐졌기에 살아있다. 우리의 종착지는 ‘왜 살아있는지’ 만큼 꽤나 단순하다. 바로 죽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건 어떻게 죽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뭐라고 하고 행복하게 죽느냐, 아님 그냥 죽느냐. 휘트먼의 시가 생각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시였다. 그 대답은 이랬다. 네가 여기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힘찬 연극은 계속되고, 네가 시 한 구절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시 한 구절을 찾아낸 사람은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 한 구절이 거저 오지는 않는다. 행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부대껴야 한다. 이 아름답지 못한 세상을 천국 가려고 교회가듯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천 번 흔들리든 그렇지 않든. 그러다 운 좋게 한 행복 얻어내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이 말에 책임져야 할만큼 세상에 뭐가 있는 건 아닌듯 하다.